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화조 사건 (문단 편집) == 서관희와 [[숙청]] == 1997년 초에 [[인민보안부|사회안전성]] 본부에 중앙상무조가 설치되고 채문덕이 책임자로 오른다. '전국 모든 도, 시, 군 안전부에 심화조를 설치하고 간부들의 경력을 검증하라'는 지시가 김정일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그리고 그 첫 희생자는 바로 당시 중앙당의 농업 담당 비서였던 서관희(문화어식인 "서관__히__"로도 알려짐)라는 인물이었다. 서관희는 이 당시 김정일이 비료를 사오라고 내린 300만 달러를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교화 생활 중이었는데, 심화조는 서관희를 다시 불러내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의 사회안전성 예심국 구류장 안에서 모진 [[고문]]을 가한다.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한 서관희는 '자신이 서북청년단 잔당이고, 북한 사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비료값을 횡령했다'는 거짓 자백을 한다. 여기에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이미 한참 전인 1984년에 타계한 [[김만금]]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으며, 전 평안남도 당위원장 [[피창린]], 전 [[개성시]] 당 책임비서 [[김기선(1927)|김기선]], 전 [[강원도(북한)|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구 역시 서북청년당 잔당이란 자백이 나왔으며, 채문덕을 몰락시켰던 두 인물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 문성술과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 서윤석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진술이 나왔던 것이다. 이에 채문덕과 그를 배후조종한 장성택은 본격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작은 자신들을 끊임없이 견제하던 중앙당 책임비서 문성술을 겨냥한 것이었다. 중앙당의 책임 비서라면 서열로는 김정일 다음 가는 북한의 2인자이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 등장한 그들은 개의치 않고 문성술과 그 일가족을 전부 간첩으로 몰아 체포했다. 그때부터 숙청 열기에 불이 붙어 문성술 계파의 모든 인물들을 남조선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처형은 즉시 시작되어 위에 거론된 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김만금마저 묘소에서 파내어져 시신의 머리에 총격이 가해졌다.''' 한 마디로 [[부관참시]] 당한 것이다. 참고로 김만금은 수십 년간 북한의 농업부문에 충실히 종사해 왔을 뿐더러 6.25 전쟁 중에는 평양이 함락 될 때 김일성 조상들의 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공적까지 있는 사람인데도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격이다.[* [[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80]]] 덤으로 김만금의 후손들까지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김일성 일가를 수호했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뭉쳐 김일성 일가에 충성을 바치던 후손들에게 역적이라는 평가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기에 김만금의 후손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고문끝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1970년대의 김일성 후계 쟁탈전 중 김만금이 김정일의 정적이었던 [[김성애]]에게 도움을 준 일로 하여 김정일에게 원한을 산 것으로 여기기도 [[http://nkd.or.kr/news/article/view/3987|한다]]. 림형규, 피창린, 김기선 등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을 하고 총살형을 당했다. 반면 문성술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안전부 구류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심화조는 문성술에 설사약을 먹이고 3일 동안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살해했으며, 서윤석은 살았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되었다. 처형 당한 간부들의 유족들은 사회안전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던 18호 관리소로 옮겨졌다. 서관희도 [[공개처형]] 당했는데, 그의 애인으로 알려졌던 생물학자 [[백설희(1939)|백설희]]에게도 그 불똥이 튀었는지 [[탈북자]] [[신동혁]]은 [[개천 수용소]]에 수용되었을 때 그녀를 봤다고 첫 책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물론 신동혁은 그녀가 누군지는 몰랐고, 그냥 당시 수감자들 중 작업반장이었던 그의 말을 더럽게 안 듣는 떽떽거리기나 하는 노망 난 할망구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가 남한으로 와서야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고. 단, [[신동혁]]의 [[개천 수용소]] 생활에 대한 증언은 상당 부분 과장되었던 것임이 후에 밝혀져서, 백설희에 대한 증언의 신빙성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다. 이미 2003년 시점에서 북한에선 백설희를 과거의 선구자로 선전하였고 2019년에는 80세 생일을 맞이해서 김정은이 생일상도 내려주었다. 심화조가 남조선과 내통한 증거로 사용한 근거들은 주로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들이었고 이마저도 대부분 갖다붙이기 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6.25 때 살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용의자 선상에 올랐다는 의미이다.''' 특히 제일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황해도 사람들로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마저도 재수사를 받고 그 후손들은 간첩으로 몰렸다. 반혁명분자는 3족을 멸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의 친척들과 후손들도 전부 지방으로 쫓겨가거나 처형당했다. 남조선 간첩의 친척들이라 하여 숙청된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15호 정치범 수용소(일명 [[요덕 수용소]])가 확장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